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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히 살아내야 할 시간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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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경 작성일18-10-31 15:26 조회1,5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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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히 살아내야 할 시간만 남았습니다 / 김정한
 
첫눈이 내렸다고 해요. 나는 보지 못했는데 첫눈이 내렸다고 하네요.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느닷없이 찾아온 겨울 손님, 첫눈은 그렇게 겨울을 물어다 놓고 사라졌습니다. 발갛게 물든 붉은 단풍이 떨어지기 전에 가을이 떠날 준비도 하기 전에 예고 없이 날라든 낯선 고지서처럼 겨울은 또 이렇게 배달되었고, 이별을 미루던 가을은 야금야금 서슬 퍼런 발걸음으로 점령하는 겨울에게 자리를 내어 주네요. 화려했던 만추, 11월도 이렇게 떠나가요. 흔들리는 동공에 잡힌 세상은 온통 무채색의 옷으로 갈아입네요. 화려하고 탱글탱글 열매로 가득한 수채화의 세상이 묵직한 한편의 수묵화의 세계로 들어가고요. 꺼지기 전의 마지막 불꽃처럼 화려하게 불타오르다가 형형색색의 사연들을 다 토해내지 못한 채 막 이별을 고하는 가을은 헛헛함으로 가득합니다. 가지에 채 떨어지지 못한 붉은 잎이 무엇이 아쉬운지 애잔하게 붙어 있네요. 이렇게 또 한 번의 겨울이 찾아왔어요. 세상은 동토의 빙하 같은 색을 머금은 채 푸른 안개로 뒤덮일 거예요. 겨울이 깊숙이 파고들어 존재감을 드러내며 세상을 뒤흔들 거예요. 누군가에게는 결실로, 누군가는 상실로 각자의 기억 속에 머물 겠죠. 머지않아 가슴을 후려치는 삭풍과 눈보라가 몰아칠 거고요. 누군가 손 내밀어주는 따뜻함과 온전한 사랑이 있다면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겠죠.
 
청춘시절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었어요. 무성한 열매를 주렁주렁 단 사과나무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죠. 스스로 햇빛을 받으며, 바람에 흔들리며 또 수분을 빨아들여 가지 곳곳에 영양분을 골고루 나눠주며 싹을 틔우고 잎을 키우며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싶었어요.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정직하게 성실하게 그 자리를 오래도록 지키고 싶었죠. 어릴 적 기억이지만 시골집 앞에 주목나무가 있었죠. 친구들보다 키가 작았던 나는 8살 즈음 목이 꺾어지도록 나무를 올려다보며 나무에게 작은 소망을 말한 적이 있었죠. '나무처럼 키가 크고 싶다고' 나무에게 기대어 속삭이던 적이 있었죠. 그렇게 몇 년 동안 나무에게 소망을 얘기한 덕분인지 초등학교 5학년 즈음에 놀랄 만큼 키가 커져 아주 많이 기뻐했죠. 그때부터 나무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고 나무처럼 살 거라고 다짐한 거죠. 그 후 나무처럼 살기 위해 애를 썼죠.
 
햇빛이 들면 놓치지 않고 가지를 뻗었고, 물이 스며들면 주저 않고 뿌리를 깊숙이 뻗었어요. 그렇게 이십 대 중반에서 서른 중반까지 일이 삶이라며 일에 몰입하며 승부를 걸었고 정직하게 일한 결과로 평가를 받고 싶었죠. 그러나 앞으로만 가다 보니 경쟁자가 생기고 장애물도 만났죠. 나만의 핸디캡을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졌죠.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도 아닌데 융통성이 부족한 내가 그 벽을 넘어서지 못했어요. 물론 가끔은 실력보다 인간관계가 실력을 넘어서는 능력이 될 때도 있죠. 그것에 잘 적응했더라면 아마도 처음의 그 길로 쭉 갔을지도 모르고요. 인간관계에 유독 서툰 나는 튼튼한 가지를 꺾이는 사고를 자주 만났어요. 열심히만 하면 내 뜻대로 될 것 같았는데. 세상은 극복하기 힘든 것을 내게 주문했죠. 중요한 것을 잃고 나니까 심하게 좌절하게 되었고 아무 많이 방황을 했어요. 어느 날부터 비뚤어진 세상의 단면을 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융통성이 없는 나로서는 세상과 조금씩 멀어지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죠. 처음에는 분노를 품은 채 마음을 닫았지만 결국에는 상처 입은 새가 되어 세상을 피해 나만의 동굴을 만들었죠. 몰론 그것이 또 하나의 길을 열게 해주었지만요.
 
노력하기에 따라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을 여는 기회는 있어요. 내 나무에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서도 내가 수확을 할 수가 없는 날도 있어요. 생의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생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으니까요. 이제는 빠름에서 느림으로, 속도가 아닌 방향을 생각하며 가죠. 이렇게 삶의 중턱을 넘고서야 깨달았어요. 그 잘난 능력과 실력도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 평범하고 건강한 행복을 위해서는 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교만함도 지나친 욕망도 행복한 생을 살아가는데 독일 수도 있다는 것이에요. 차라리 넘치는 풍요보다는 조금 부족해야 순간순간 몰입하며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에요. 천천히 가야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게 된다는 것이에요.
 
느리게 가다보니 가진 것이 별로 없고 버릴 것도 많지 않아요. 모든 게 가벼워요. 걷는 것도 느리지만 걸어가는 길이 호젓해서 좋아요. 이제 나는 서두르지 않아요. 힘에 부치면서까지 급히 뛰어오르며 정상까지 올라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내가 가는 이 숲길을 꾸준히 걸으며 보이는 것들, 코끝에 스미는 향기를 맡으며 가는 것도 좋으니까요. 목표를 수정하니까 그제서야 겨울 숲도 푸르게 보이고 박하 향기가 느껴지죠. 욕심을 내려놓으니 스쳐가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말을 걸며 친구가 되어 주니까요. 지나가는 이름 모를 겨울새가, 지나가는 청아한 바람이 욕심을 내려놓은 것에 대해 칭찬을 해주듯 새는 노래하고 겨울바람은 청아하게 뺨을 스치며 지나가죠. 이렇게 편안하게 숲길을 거닐며 젊은 날의 안부도 묻죠. "왜 그렇게 무모한 모험을 하였나, 자꾸 위로만 오르려 했던 것, 무모했던 춤사위가 두렵지 않았냐" 고 살짝 꼬집어보며 지난날의 슬픔을 삼키죠.
 
실패했던 그때를 돌아보면 조연의 능력임에도 주연을 탐냈던 것 같아요. 내면의 욕망의 크기를 정확히 가늠하지를 못했던 것 같아요. 패배에 대해 진솔하고도 선명한 인정이 필요했는데 감추려 하고 그렇게 뒤틀린 자아를 또 다른 교만으로 위로받은 것 같아요. 그 대문에 내가 만든 동굴에 갇혀 결핍을 부둥켜안고 누구를 원망하며 오래도록 울었던 것 같아요. 이제서야 세상의 모든 것들은 따뜻하고 다양하게 느껴져요. 누군가는 장미꽃을 바라보며 웃고 있고 누군가는 그 향기를 맡으며 울고 있는 것이 보이니까요. 또 누군가는 장미를 꺾기를 좋아하지만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 두고 가끔 와서 보기를 좋아하니까요. 그것을 인정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이제는 무엇이든 내가 좋아하는 특별한 것을 찾아 노력하려고요. 욕심내지 않고 소소하게 기쁨을 주는 것만 바라보려고요. 삶에 중턱에 이르고 보니 부지런히 달려온 이 길도 돌아보니 한나절 햇살보다 짧았어요. 내 앞에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욕심이 없어요. 다만 글을 쓰며 살아가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게 허락되길 바랄 뿐이에요.
 
아름다운 추억, 슬픈 기억, 아쉬움, 새로운 희망을 뿌려놓고 서서히 한 해가 저물고 있어요. 그럴듯한 계획을 세워놓고도 실제로 하고자 했던 것들이 정녕 무엇이었나를 고민해볼 때죠. 대단한 사명을 안고 세상에 온 건 아니지만 올바르게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점검해 볼 때죠. 자신과의 약속을 얼마나 정직하게 지켜왔는지도 따져볼 때죠.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살랑이던 설렘의 날은 얼마던가를, 여름 소낙비처럼 고통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날은 얼마던가를, 가을 하늘처럼 맑디맑은 기쁜 날은 얼마 던가를, 짙은 회색빛 겨울 하늘 같은 고독한 날은 얼마 던가를, 곰곰이 따져보며 반성하고 칭찬하고 응원할 때입니다. 충실하게 지혜를 모아 사유할 때입니다. 
 
나무는 봄날에 품었던 소망들이 다 이루어고 처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온 곳,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많던 잎들이 인연을 다하고 떠났습니다. 다시 불덩이를 삼킨 듯 뜨겁게 부활하기 위해 깊디깊은 휴식에 들어갔습니다. 추위와 어둠 앞에 납작 엎드려 있어야 다시 찬연한 봄과 마주할 테니까요. 침묵과 성찰, 시련의 시간이기는 하지만 또 희망을 잉태합니다. 겸허히 순환하는 자연이고 싶습니다. 곱디고운 한 잎의 단풍마저 다 털어내는 나무이고 싶습니다. 움켜쥔 풍요로는 결코 혹독한 겨울을 건널 수 없기에 다 털어내고 비우는 나무이고 싶습니다.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나무이고 싶습니다. 끊어질 듯 말듯 한줄기 가녀린 선으로 이어진 내 삶의 궤적, 이제는 탐욕 가득한 밭에 호미질 하던 부질없는 짓들 다 내려놓고 초연히 살아내야 할 시간만 남았습니다.

김정한 신작 산문집 [나는 아직 괜찮습니다 p9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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